축구를 잘 모르는 사람도 메시는 안다. 그런데 그 메시가 ‘스페인 노벨상’이라 불리는 아스투리아스 상을 받았다는 소식을 접하고 잠시 멈칫했다. 스포츠 선수가 노벨상 계열 상을 받는다고? 처음엔 고개를 갸웃했는데, 기사를 읽어보니 납득이 갔다. 스포츠를 넘어 사회적 영향력을 인정받은 거다. 메시 수상 소식을 보면 그가 ‘위대한 스포츠맨으로 기억되고 싶다’고 말했다는 대목이 나온다. 이 말이 꽤 오래 마음에 남았다. 나는 해양 스포츠를 좋아하는 평범한 자영업자지만,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은가’라는 질문은 업종을 떠나 누구에게나 유효하지 않나 싶다.

아스투리아스 상은 스페인 북부 아스투리아스 지방정부가 매년 수여하는 상으로, 1980년 제정됐다. 문학, 예술, 사회과학, 국제협력, 과학기술 등 여덟 개 부문으로 나뉘고, 그중 하나가 ‘스포츠’ 부문이다. 노벨상과는 계보가 다르지만 상의 권위와 운영 방식이 비슷해 ‘스페인의 노벨상’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그동안 이 상의 스포츠 부문은 올림픽 메달리스트나 세계 기록 보유자들에게 주로 돌아갔는데, 메시의 수상은 기록 자체보다 그가 축구를 통해 만들어낸 사회적 파장에 주목한 사례라는 점에서 눈에 띈다. 실제로 그는 유니세프 친선대사로 오래 활동했고, 소아 환자를 위한 병원 설립에 재원을 대는 등 경기장 밖의 행보도 꾸준히 이어왔다. 수상 소식이 단순한 ‘축하 이벤트’로 소비되지 않고 오래 곱씹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스포츠에서 ‘위대함’은 기록으로 증명되는 경우가 많다. 골 수, 우승 횟수, 개인 트로피 숫자. 하지만 메시가 언급한 위대함은 숫자가 아니라 태도에 가깝다. 해양 스포츠도 비슷하다. 서핑을 오래 타다 보면 파도를 많이 탄 사람보다 바다를 존중하는 사람이 더 기억에 남는다. 나는 처음 서핑을 배울 때 강사가 ‘파도와 싸우지 마라’고 한 말을 아직도 기억한다. 그때는 무슨 소린가 싶었는데, 몇 번 파도에 깔리고 나니 알겠더라. 자연 앞에서 겸손해지는 게 결국 실력의 일부라는 걸.
이 ‘겸손’이라는 단어가 처음엔 좀 거창하게 들렸다. 그런데 서핑을 조금 하다 보면 겸손은 미덕이기 이전에 생존의 문제라는 걸 알게 된다. 파도의 힘을 이기려 드는 순간 몸이 굳고, 굳은 몸은 물속에서 가장 위험하다. 반대로 파도가 나를 어디로 밀어낼지 받아들이는 순간 몸이 풀리고, 풀린 몸이야말로 다음 파도를 탈 준비가 된 상태다. 바다에서 배운 이 감각을 가게 운영에 대입해보면 재미있는 지점이 있다. 손님이 몰리는 시간대에 ‘이걸 다 어떻게 감당하나’ 싶은 순간이 오는데, 그때 힘을 주면 실수가 늘고 실수가 늘면 손님도 눈치를 챈다. 반대로 ‘지금은 이 정도 속도가 한계구나’ 하고 받아들이면 오히려 흐름이 부드러워진다. 파도와 싸우지 말라는 말은 바다만의 규칙이 아니었던 셈이다.
‘위대한 스포츠맨’이라는 표현을 곱씹다 보면 스포츠와 예술, 그리고 일상의 경계가 생각보다 흐릿하다는 느낌이 든다. 메시가 축구공을 다루는 방식은 어떤 화가가 붓을 다루는 방식과 닮았다는 말을 어디선가 읽었다. 나는 그 비유가 꽤 마음에 들었다. 해양 스포츠도 마찬가지다. 윈드서핑이나 카이트서핑을 보면 바람과 대화하는 것 같은 동작이 나온다. 그건 그냥 운동이 아니라 일종의 표현이다. 그래서 나는 가끔 바다에서 사람들이 타는 모습을 한참 바라본다. 잘 타는 사람은 군더더기가 없다. 힘을 빼고 흐름을 타는 모습이 꼭 좋은 글을 읽는 것 같다.
좋은 글에도 군더더기가 없다. 꼭 필요한 단어만 남기고 나머지를 덜어내는 편집의 과정이 있고, 그 덜어냄이 오히려 문장을 단단하게 만든다. 잘 타는 서퍼의 동작을 보면 그 편집의 과정이 눈에 보이는 것 같다. 팔을 크게 휘젓지 않고, 상체를 과하게 젖히지 않고,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최대한의 균형을 잡는다. 반대로 처음 배우는 사람은 온몸으로 물을 때린다. 열심히는 보이지만 배가 나아가지 않는다. 나는 이 차이를 ‘노력의 밀도’라고 부르고 싶다. 많이 움직이는 것과 제대로 움직이는 것은 다르고, 그 차이는 결국 얼마나 오래 그 일을 해왔는가에서 갈린다. 메시가 화가의 붓에 비유되는 것도 같은 맥락일 거다. 그는 오래 했고, 그래서 덜어낼 줄 안다.
이 이야기를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기억되는 방식’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진다. 메시는 축구선수로 기억되고 싶다고 했지만, 사실 그는 이미 축구를 넘어선 존재가 됐다. 나는 자영업을 하면서 ‘어떤 가게로 기억될까’를 종종 생각한다. 매출 숫자보다 오래 남는 건 아마 태도일 거다. 손님이 실수로 컵을 깨뜨렸을 때 놀라지 않게 웃어주는 것, 바쁜 와중에도 인사를 잊지 않는 것. 그런 사소한 것들이 쌓여 ‘그 집은 좀 달랐다’는 기억을 만든다. 스포츠 선수가 기록보다 태도로 기억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가게를 오래 하다 보면 단골이라는 존재의 의미도 조금씩 달라진다. 처음엔 ‘자주 오는 손님’이었다가, 나중엔 ‘이 집이 어떻게 운영되는지 아는 사람’이 된다. 그런 손님은 메뉴가 바뀌면 알아채고, 사장이 지쳐 보이면 말없이 웃어준다. 나는 그런 관계가 매출표에는 잡히지 않는 자산이라고 생각한다. 한 번은 오래 다니던 단골이 이사를 가면서 마지막으로 들렀는데, 인사 대신 ‘여기 와서 웃는 법을 배웠다’는 말을 남겼다. 그 말이 얼마나 오래 남았는지 모른다. 그날 이후로 나는 ‘무엇을 팔았나’보다 ‘어떤 시간을 만들었나’를 더 자주 떠올린다. 기억되는 방식이란 결국 이런 것이다.
주의할 점도 있다. ‘위대함’이나 ‘기억되는 방식’ 같은 이야기를 하다 보면 자칫 거창해지기 쉽다. 나는 그런 담론이 싫어서 일부러 일상의 언어로 바꿔 말하려고 한다. 메시가 노벨상 계열 상을 받은 게 대단한 건 맞지만, 그걸 ‘우리도 위대해져야 한다’는 식으로 확장하면 피곤해진다. 그냥 ‘저 사람은 자기 일을 오래, 진심으로 해온 사람이구나’ 정도로 받아들이는 게 적당하다. 해양 스포츠도 마찬가지다. 프로 선수가 되라는 게 아니라, 바다에서 보내는 시간이 조금 더 의미 있으면 좋겠다는 정도의 기대가 적당하다.
거창한 담론이 피곤한 이유는, 그런 이야기가 대개 ‘지금의 나로는 부족하다’는 전제를 깔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 전제가 싫다. 메시의 수상 소식을 읽으면서 내가 느낀 건 감탄이나 좌절이 아니라 ‘아, 저 사람은 자기 자리에서 오래 버틴 사람이구나’ 정도의 담담함이었다. 그 담담함이 오히려 오래 갔다. 자영업을 하면서도 비슷한 태도를 유지하려고 한다. 옆 가게가 잘되면 배가 아프기보다 ‘저 집은 저렇게 하는구나’ 하고 한 번 들여다본다. 그런 작은 관찰이 쌓이면 어느새 내 가게의 언어가 조금씩 바뀌어 있다. 위대해지려는 게 아니라, 조금 더 나은 오늘을 만들려는 정도의 마음가짐이다.
얼마 전에는 오랜만에 동해 쪽으로 차를 몰고 갔다. 별것 아닌 하루였는데, 물 위에 떠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문득 메시 생각이 났다. 다들 각자의 방식으로 ‘잘하고 싶은’ 사람들이라는 생각. 기록으로 증명되지 않아도 괜찮다는 생각. 그날 바다는 유난히 잔잔했고, 나는 거의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앉아만 있었다. 그런 시간도 스포츠의 일부라는 걸 인정하게 된 게 최근의 작은 변화다.
예전에는 바다에 가면 뭐라도 해야 하는 줄 알았다. 서핑을 타거나, 수영을 하거나, 최소한 사진이라도 남겨야 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나이가 들수록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 얼마나 귀한지 알게 된다. 앉아서 파도 소리를 듣고, 사람들이 타는 걸 구경하고, 가끔 옆자리 낯선 이와 날씨 이야기를 나누는 것. 그런 시간은 기록으로 남지 않지만 몸에 남는다. 다음에 바다에 나갔을 때 이유 없이 마음이 편한 것도 아마 그런 시간이 쌓인 결과일 거다. 스포츠를 ‘하는’ 것만 스포츠라고 부르던 시절이 있었는데, 요즘은 ‘바라보는 것’도 스포츠의 한 형태라고 생각한다.
결국 스포츠든 일상이든 중요한 건 꾸준함과 태도다. 메시의 수상 소식은 그 당연한 사실을 다시 한 번 상기시켜줬다. 나는 당분간 바다에 나가서 파도와 덜 싸우고, 가게에서는 손님에게 조금 더 웃어보려고 한다. 거창한 결심은 아니다. 그냥 기억되는 방식에 대해 조금 더 신경 쓰기로 한 것뿐이다.